봉오동 전투 100년 만에 대한민국 품에 안긴 홍범도 장군(1868-1943)...

장군의 귀환...

왜 이제껏 머나먼 타지에서 계셨나?

장군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도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여기 대한민국에서 평안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홍범도 장군의 정의로운 일들은 훌륭한 후손들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12년도의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은 1868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양반집의 머슴으로 일하였으니 어린 시절은 불우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의 어머니는 홍범도를 낳자마자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홍범도의 나이 9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홍범도는 머슴이라는 낮은 신분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자신의 위상을 올리고자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군대의 나팔수로 입대하였으나 그 당시 군대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이탈하고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된다.

 

 

그 당시 머슴살이와 여러가지 신분상 여건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어린 홍범도.

절에서 글을 깨우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깨우쳤다. 이때 당시 이순신 장군의 존재도 알았다고 한다. 

이 시절에 비구니였던 부인를 만나 결혼해서 황해도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강원도 북부 산악지대에서 노루와 사슴, 멧돼지 등 짐승들을 사냥하는 포수 생활을 하게 된다. 총을 잘 쏴 포수 사이에서도 명성과 지지를 얻어 대장 노릇도 한다. 그렇게 포수 생활을 10년쯤 하고 있을 때쯤 을미의병이 발생한다.

 

반응형

 

을미의병이 일어날때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유는 일제가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을 시행해서 총과 포 등 화기물품들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사냥을 업으로 하는 포수들에겐 생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법이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게 생업을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홍범도 장군이 포수 생활할 때 총을 잘 쏴다고 한다. 지금쯤 아마 스나이퍼 역할을 할 정도로 잘 쏘았다고 하는데... 이때 당시 매복하여 일본군을 정밀 타격했다고 한다. 한 10명 정도... 전설의 스나이퍼 홍범도 장군...

 

<1921년의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은 정미의병때 최대 600~700여 명 정도의 의병을 규합해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모든 의병이 그러하듯이 게릴라 작전으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주로 실시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의 부인이 일본군에게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장남은 전투 중에 전사, 차남도 결핵으로 병사하고 만다. 

 

결국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야 만다. 이에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했었던 의병들은 연해주로 이동한다. 홍범도 장군도 이 때 연해주로 이동해서 유격전을 전개한다. 그리고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을 맡았다. 이때 봉오동 전투를 이기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다. 

 

후에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려극장의 수위로 지내다 1943년 노환으로 별세한다.

 

이토록 파란만장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의 계기로 성사되었고, 이후 2020년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송환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되었다가, 2021년 송환되었다. 

 

대한민국은 8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으로 파견했다. 15일 광복절 밤 9시쯤 유해가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이틀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치고 난 다음,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홍범도 장군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 되었다. 

 

영웅의 귀환 홍범도 장군님... 이제 편히 쉬소서!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